종교와 과학 7-9장(송인화)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시 : 2015-12-1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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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버트란드 러셀, 김이선 옮김, 동녘, 2011)

(송인화, 2015.11.21.)

 

< 7장 신비주의 >

 

1. 과학과 종교 사이 관계

- ‘진리에 도달하는 데 있어 과학 이외의 방법이 있음’을 암시하는 주장은 틀렸다고 믿는다. 즉,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차원에 놓쳐 있기 때문에 (종교는 가치를, 과학은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실상과 다르다. 과학이 윤리학이나 시 등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보아왔고, 이제 종교도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종교는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주장을 펼쳐야 한다.

 

2. ‘계시’(검증의 필요성)

1) 자기들에게 진리가 계시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각의 대상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것을 확신한다고 고백하지만 그 증언을 인정할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2) 우선, 이들의 증언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검증될 수 없다. 사람들은 신비주의자들이 비전이 발생했다는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계시를 받지 못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확신할지 모른다. 그래서 과학적인 검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증언에 대해 과학적 검증을 시도할 것이다.

3) 신비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주된 논거는 그들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1)모든 분할과 분리는 실제가 아니며, 우주는 분할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통일체이다. (2)악은 환상이며, 환상은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을 스스로 존립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서 생겨난다. (3)시간은 실제가 아니며, 실제는 영속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시간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 

 

3. 신비주의자 증언의 검증

1) (계시를 주장하는) 증인들이 어느 선까지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다가, 그 선을 넘어가면 완전히 다른 말을 한다. 구교도는 성모마리아의 환영을 보지만, 신교도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에게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위대한 진리를 계시하지만 불교도는 아니다. 

2) 우리는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증거를 직접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을 것이다. 요가가 통찰력을 준다는 주장을 검증할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한 방식으로 숨을 쉰다면, 시간이 실제가 아님을 확신하게 될 것이라 장담한다고 가정하고 이를 따라 해서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보통 호흡으로 돌아오자 그 환영을 믿어야 할지 자신이 없어진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3) 우선, 시간이 실제가 아니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 이해하자면 이는 ‘이 일은 저 일 전에 발생했다’와 같은 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텅 빈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향상과 퇴보 사이에는 구별이 없고, 행복으로 끝나는 슬픔과 슬픔으로 끝나는 행복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이러한 견해는 과학뿐만 아니라 분별력, 희망, 그리고 노력에까지 죽음을 가져온다. 이것은 세속적 지혜, 그리고 종교, 또 더욱 중요한 도덕과 양립할 수 없다.

 

4. 신비주의는 사실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1)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제성’을 법정에서 흔히 말하는 실제성과 다른 의미로 접근해야 한다. 신비주의자들의 ‘실제’라는 단어에는 논리적인 의의가 아니라 감정적인 의의가 있다고 믿는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만약,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그가 우주를 창조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음 속에 품었을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완전한 전체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2) 신비주의는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따라서 과학에 의해 부정되거나 긍정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이 감정적인 중요성과 과학적인 타당성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술에 취해 뱀을 본 사람의 육체 상태는 비정상이며, 따라서 비정상적인 지각을 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적인 지각을 한 사람들의 증언은 정상적인 지각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능가할 수 없다.

 

< 9장 과학과 윤리학 >

 

윤리학 연구는 전통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도덕 규칙에 관여하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에 관여한다.

 

1. ‘양심’

1)  행동 규칙은 미개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색적이 되어감에 따라 규칙보다 마음의 상태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2) 외면적 행동 규칙에 기대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은 ‘양심’에 대한 믿음인데, 이것은 특히 프로테스탄트 윤리학에서 중시됐다.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옳고 그른 것을 계시하시므로, 죄를 피하고 싶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3) 이 이론에는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우선, 양심이라는 것이 사람을 가려 다르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 연구를 통해 드러난 바, 양심적인 감정의 원인은 사실은 세속적인 데 있다는 것이다. 양심은 어떤 이에게는 침략 당한 조국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경우야 어찌됐건 전쟁에 가담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말한다.

4) 그러나 사실 양심은 교육의 산물이다. 양심이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인류의 대다수에게 있어, 교육자들의 훈련의 결과이다. 따라서 외면적 도덕규칙으로부터 윤리학을 해방시키고 싶은 바람은 정당하지만, ‘양심’이라는 개념을 수단 삼아 만족스럽게 성취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2. ‘선’

1) 철학자들은 행동 규칙들이 종속적으로 존재하는 서로 다른 입장에 도달했는데 ‘선’이라는 개념틀이다. 이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의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가 그 존재함을 보고 싶어 하는 무엇-만약 유신론자라면 신을 기쁘게 하는 무엇-이다.

2) 서로 다른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선’의 개념을 형성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이루는 것은 신의 지식과 앎이라고 주장한다. 보편적 사랑, 아름다움의 향유나 쾌락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선’이 정의되면 가능한 많은 선과 그것에 관계된 가능한 적은 악을 창출하리라고 믿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3) 그러나 ‘선’의 의미를 명확히 하려고 할 때 매우 심각한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쾌락이 선이라는 밴담의 신조는 돼지의 철학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각 편의 논객은 과학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기댈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사한 감정을 일으킬 수사학적 방법들을 동원하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지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들이다.

 

3. ‘가치’

1) ‘가치’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전적으로 지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 이것 혹은 저것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감정에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4. ‘욕구’

1) 선악에 대한 모든 관념들은 ‘욕구’와 관계가 있다. 각자는 자신의 욕구가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조화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기편을 얻으려고 한다.

2) 그러므로 윤리학은 정치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치는 한 집단의 욕구를 개인들에게 미치려는 시도이다. 혹은 반대로 한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자기가 속한 집단의 욕구로 만들려는 시도이다.

3) 윤리학은 우리의 일정 욕구들에 대해 사적인 것을 넘어선 어떤 보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가치 있게 여기는 목적을 증진시키면서도, 가능한 한 개인적인 이익에 부합되게 자신의 법을 구성할 것이다.

 

4) 소망이 생겨난 것은 개인적이지만 그것이 욕구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나는 윤리학에 수많은 혼란이 야기된 이유가 이처럼 특수성과 보편성이 기이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 윤리학은 참이든 거짓이든 어떠한 진술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일반적인 욕구, 즉 인류 일반의 욕구와 관계된 욕구- 만일 존재한다면 신, 천사, 악마의 욕구와 더불어-로 구성되어 있다.

 

5. 가치의 ‘주관성’

1) 내가 옹호하고 있는 이론은 가치의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학설의 한 형태다. 만약 두 사람이 가치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면 둘은 진리에 대한 의견이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 다를 뿐이다.

2) 이러한 견해를 취하는 근거는 이것 혹은 저것에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치의 차이를 결정하는 수단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의견 차이는 ‘취향’의 문제이지 객관적인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3) 이러한 학설의 결과는 상당하다.

첫째,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누구에게는 죄가 누구에게는 미덕이 될 수 있다.

둘째, 우주적 목적을 믿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지지할 수 없게 된다. 즉, 세계에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어떤 목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4) ‘객관적’ 가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내가 옹호하는 견해가 비도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주관적 가치 이론에서 비롯된 윤리적 결과들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은 보복성 처벌과 ‘죄’의 개념의 거부이다. 

 

5) 우리의 행동은 윤리가 무엇이든 간에, 개인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조화를 이루는 한, 사회적인 목적에 이바지할 것이다. 최대한 그런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 현명한 제도들이 맡은 바 임무이다.

 

6) 과학이 가치의 문제들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까닭은 가치의 문제들이 지적인 측면에서 결정될 수 없으며 진위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얻어져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발견될 수 없는 것을 인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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