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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시 : 2015-09-26 08: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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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urage to be 2015. 09. 19. 한미야
3. 병리학적 불안, 생명력, 그리고 용기 (Pathological Anxiety, Vitality, and Courage)
I. 병리학적 불안의 본질
1. 불안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해결되지 않는 갈등에 대한 인식이다. 불안에 대한 이해는 존재론적으로 접근할 때만 일관되고 포괄적인 이론으로 조직될 수 있다. 병리학적 불안이란 실존적 불안이 특정한 상황 아래 놓인 상태이다. 병리학적 불안의 특성은 ‘자기긍정’ 혹은 ‘용기’가 ‘불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용기의 처리 대상이 되기 위해 ‘불안’은 ‘두려움’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에도 용기는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불안이라는 것은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는 ‘비존재’(nonbeing) 상태의 불안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용기란 ‘비존재를 포함하는 자기 긍정’이다. 용기는 불안을 끌어안으며 자기 긍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때 ‘용기’의 반대 개념은 ‘절망’(despair)이다. 2. 불안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신경증(neurosis)으로 도망함으로써 ‘절망’이라는 극한의 상태를 피해간다. 그는 자신을 긍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다. “Neurosis is the way of avoiding nonbeing by avoiding being.”(61). 신경증 상태에서 자아는 축소된 상태이다. 즉 약하고 축소된 자기 긍정의 상태이다. 그는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잠재력 있는 존재보다 못한 부분만을 긍정하게 된다. 그는 그나마 남아있는 가능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 잠재력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신경증적 인격은 비존재, 심오한 불안에 훨씬 민감하여 ‘고정되고 제한되며 비현실적인 자기 긍정’에 이른다. 이들은 이렇게 방어적이 되지 않으면 비현실적인 자기 긍정마저 망가져버려 자기긍정이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 즉 절망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자기긍정은 여전히 파편적(fragmentary)이지만, 두려움의 구체적 대상에 대해 용기 있게 대처하여 극한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 그는 신경증 환자보다도 더 많은 방향을 통해 현실에 적응한다. 그는 신경증 환자와 비교하여 자기 긍정의 범위(extensity)에서는 더 넓지만 신경증환자의 창의성을 가능하게 하는 강렬함은 부족하다. 일반인은 불안한 상태로부터 상상의 세계를 만들지는 못한다. 신경증 환자의 제한되고 고정된 자기긍정은 불안이 야기하는 심각한 영향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그로 하여금 현실과 불화하게 만들고, 또한 또다른 참을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의 공격을 야기함으로써 그를 파괴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용기를 북돋음으로써 광범위하고(extensive) 강렬한(intensive) 상태로 회복되어야한다. 3. 격변의 시대가 오면 정상인의 자기 긍정도 병리적이 된다. 그는 현실에 대한 그의 개방성을 잃고, 심각한 불안을 느낀다. 이제 실존적 불안이 신경증적 불안과 섞여서 그 경계가 희미하게 된다. 금욕주의 아래 도사리는 비난은 병적인가? 악마에 대한 불안은 항상 신경증적인가? 실존주의자들은 신경과민적 불안이 야기하는 인간의 어려움에 대해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가?
II. 불안, 종교, 그리고 의학
* about the theological and the medical faculties 모든 불안이 병리적이기 때문에 의약은 불안의 치유가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다른 직업군과 서로 도울 때 진정으로 인간을 도울 수 있다. 사제, 혹은 목사는 존재의 불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의사는 신경증적 불안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은 반드시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치료 영역을 공유할 수 있다. 1. anxiety of fate and death: 신경증 환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경계가 만들어낸 안전함을 떠나지 못하나 이러한 경계는 비현실적인 것이므로 신경증 환자의 안전의식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이들은 또한 정작 두려움을 느껴야 할 상황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Misplaced fear is a consequence of the pathological form of the anxiety of fate and death. (69) 2. anxiety of guilt and condemnation: 신경증 환자의 도덕적 자기 방어는, 죄가 없음에도 혹은 매우 간접적인 방식으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있다고 보게 한다. 그러나 존재의 문제에 관계되는 죄나 자기 정죄는 이들에게 억눌려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러한 영역을 자기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3. anxiety of emptiness and meaninglessness: 보통의 경우 불안은 의심과 질문을 통해 전통과 권위에 의거한 확실한 의미 체계를 만들어 낸다. 반면 신경증 환자는 질문의 능력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거나 외부로부터 질문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화되려고 하면 광적인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공허함이 가져다주는 불안, 의심, 그리고 의미 없음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III. 생명력과 용기
두려움과 불안이 없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용기는 충만한 긍정을 얻기 위해 부정적인 것들을 기꺼이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생물학적 자기 긍정은 결핍, 수고, 불안전함, 고통, 일어날 수 있는 파괴 등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기 긍정이 없으면 생은 보존되지도 번식되지도 않을 것이다. 안전, 완전, 그리고 확실함에 대한 추구는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불안전, 불완전, 그리고 불확실성을 피해 다니기만 하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파괴적이 될 것이다. 삶이란 결국 두려움과 용기라는 삶의 요소를, 변화를 겪으면서, 근본적으로 안정된 균형상태로 유지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용기란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생명력의 표현이다.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는 생명력(vitality)의 기능의 하나이다. 신경증 환자들은 생명력이 없고 존재할 용기, 완전한 자기 긍정의 힘을 잃었다. 따라서 생명력이 줄어든다는 것은 용기가 사라지는 것을 수반한다. 생명력을 강화하는 것은 생존에의 용기를 강화하는 것이다. 존재할 용기가 축소된 시기는 개인적으로 역사적으로 생물학적인 연약함의 시기이기도 하다. 불안의 불균형이 계속되는 사회는 생명력이 약해진 사회이다.
1. 두려움의 감정은 두려움의 대상을 다룰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불안은 생물학적 논쟁을 뛰어넘는다. 2. 생명력의 개념(the concept of vitality): 파시즘(fascism)과 나치즘(nazism)은 생명력의 이름으로 서구 유럽 대부분의 가치들을 공격했다. 동물의 경우 두려움과 용기의 균형은 잘 균형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Laches에서 동물의 용기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용기라는 개념이 ‘피할 것’과 ‘용기 내어야 할 것’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면 용기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은 “지향성(intentionality)”, 의미와의 관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력은 그의 계획가능성에 비례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은 상호의존적이다. (He can transcend any given situation in any direction and this possibility drives him to create beyond himself. Vitality is the power of creating beyond oneself without losing oneself. ... only man has complete vitality because he alone has complete intentionality. 75) “the most vital being is the being which has the word and is by the word liberated from bondage to the given.” 이것이 결국 자유의 상태이며 자유는 삶의 힘으로 작용한다. 즉 자유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지성화가 가져온 불행한 결과의 하나는 ‘냉정한 지성’과 ‘무의미한 생명력’으로 이분화 되면서 지향성과 생명력의 중간지대로 합쳐지는 중간지대의 ‘영적인 영’(spiritual soul)이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순수히 생물학적인 것”도 “순수히 영적인 것”도 없다. “every cell of his body participates in his freedom and spirituality, and every act of his spiritual creativity is nourished by his vital dynamics.” (76) “aret?” 혹은 “virtue”는 힘과 가치, 존재의 힘과 의미의 실현을 합하는 개념이다. “spiritually formed vitality.” 용기는 고귀한 것이 된다. 미덕(virtue) 또한 남성적 힘과 도덕적 고상함을 포함한 개념이다. 따라서 지향적인 것에서 생명적인 것을 분리하는 “vitalism”은 야만적인 것을 표본으로 삼게 된다. 즉 나찌즘과 파시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pure vitality”라는 말은 모순이다. “man's power of life is his freedom and the spirituality in which vitality and intentionality are united.” (77) 3. 생물학주의에서는 용기가 생물학적 운명의 문제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아무도 존재에의 용기를 가지라고 명령할 수 없고 동시에 어느 누구도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용기를 가질 수 없다. 용기의 문제는 은혜(grace)의 문제이다. “The truth of the vitalistic interpretation of ethics is grace. Courage as grace is a result and a question.” (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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